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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교회 이 경수 목사입니다. 여기 들어와 제 설교를 읽으시는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설교를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철저하게 원고설교를 하면서 자료를 모아두었더니 그 분량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제가 설교를 처음 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갖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입니다. 그것은 제 설교의 주제이자, 제 목회의 주제요, 동시에 제 삶의 주제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름대로 그 주제에 맞게 설교하고 또한 살고자 애를 써왔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감히 내놓겠습니다. 1982년에 처음 시작했던 원고부터 요즘 하고 있는 설교까지 차근차근 올리겠습니다. 이미 워드작업을 해 놓은 것도 있지만 아직은 원고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많기에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솔직히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교 한편 한편이 저의 신앙고백인 것은 분명합니다. 저의 진솔한 신앙고백이 여러분에게 작은 울림으로 퍼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저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샬롬.
약력
- 학력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원 졸업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감리교신학대학교 부설 목회상담센타 임상목회과정(CPE) 수료
- 경력 - 현 어린양교회 담임목사 중화성경신학원 교수 배재대학교 강사 서울 생명의 전화 상담원 MBTI(성격유형검사) 일반강사 전 금란여자중학교 교사(1975. 3. - 1982. 2) 수표교교회 교육전도사(1982. 3 - 1985. 12) 쇄암교회 담임전도사 및 담임목사(1985. 12 - 1989. 8) 수표교교회 부담임목사(1989. 9 - 1996. 12)
어린양교회 소개
정식명칭 : 기독교대한감리회 어린양교회 주소 : 서울 동작구 사당1동 1037-18(3층) 담임목사 : 이경수 전화번호 : 02-587-0192 핸드폰 : 016-272-0131 이메일 : lambch@hanmail.net
어린양교회의 나아갈 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자”(마태복음 9:35)"
어린양교회의 다섯 가지 목표
하나,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나기 둘, 어린이/청소년 문화학교 “들꽃마을” 키우기 셋, 따뜻한 이들의 집 세우기 넷, 다양한 선교활동 이루기 다섯, 민족 분단의 아픔 나누고 고치기
많은 분들께서 방문해 주시고는 생소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블로그라는 구조가 기존의 개인홈페이지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 블로그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안내가 없어서 이기도 할 듯 합니다.
해서, 간략한 안내를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소개의 글 에는 이 블로그에 대한 소개와 이 안내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보기에서는 이 블로그에 올라와있거나 앞으로 올라오게 될 모든 설교문의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글은 한달단위로 새로올린 설교모음에 담겠습니다.
현재 몇분께서 종이원고로 되어 있는 설교자료를 입력하시는 자원봉사를 해 주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연도순이나 기타 정해진 순서대로 설교가 올라오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한해분의 설교가 모두 입력되면 그 때 그 때 해당 연도의 글모음으로 분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모든 자료가 입력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설교에 대한 소감이나 남기고 싶으신 글은 글 아래부분에 있는 덧글(?) 이라고 쓰인 부분을 누르시면 나타나는 덧글창에 입력하시면 됩니다.
별도의 방명록을 준비하지는 않았으므로, 방문 소감을 쓰실 분은 소개의 글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문해주셨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간단한 안내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의창조주를 기억하라 전도서 11:9-12:2 / 1996. 1.21 최근 신문의 기사 가운데 제법 크게 소개된 것으로 청소년들의 관심을 끌어 모은 기사가 있었습니다. 큰 제목이 ‘<룰라> 리더 이상민씨 동맥 끊고 자살기도’ 라는 기사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나자 신문마다, 또 제법 수준이 높고 품위가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주간지들마다 소위 스타들의 죽음의 행렬에 대한 해설 기사를 싣고 제각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방송사 한 PD는 “인격이 채 형성되기도 전인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스타로 만들어지고 스타의 수명이 자꾸 짧아지는 최근 연예사업의 특성이 젊은 스타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측면이 있다” 고 분석하면서 스타로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미 맛본 일부 스타들이 좌절할 때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약물에 손을 대거나 자살을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7일 인천의 중3 여학생은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김성재, 서지원 씨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충격을 받고 자살을 했다는 기사도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일본에서 지난 86년 10대들의 우상이었던 오카다 유키코 (18)가 실연을 비관, 건물에서 투신자살하자 이후 2주 동안 31명의 청소년들이 투신자살했던 일본의 뒤를 따르는 모습 같아 보인다. 지난해 11월 20일 스물 네살 젊은 나이의 김성재 사건( 자살인지 타살인지) 신세대 스타 서지원 라이브의 귀재 김광석 김성재. 서지원 이상민 등과 김광석은 무언가 차이가 있을 것 같았는데 이들은 왜 한결같이 자살의 길을 택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저도 혼자서 생각을 하며 관계되는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김광석에 대한 소개의 글을 읽게 되었다. 삶의 노래 읊조린 서정 가수 : 요절한 당대 최고의 라이브 가수 김광석의 음악 세계 김광석은 지난 90년 간경화로 생을 마감한 김현식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 서른 두 살에 세상을 떴고, 텔레비전에 기대지 않은 채 콘서트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그렇다. 1964년 대구에서 전파사집 아들로 태어난 김광석은 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배웠고 고등학교 때는 합창단에서 활동했다. 대학교 때 ‘연합 메아리’로 들어가 노래 운동을 시작했고 83년까지 활동했다. 84년 연합 메아리 선배들이 준비하던 김민기의 노래극 (개똥이)가 무산되자 그를 포함한 이 팀은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제작한다. 음반은 대학가에서 조용한 인기를 누렸고 87년까지 그는 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의 ‘새벽’에서 활동했다. 87년 10월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가진 노찾사의 첫 공연이 노래운동 진영에서 벌인 그의 마지막 활동이다 생활과 일치하지 않는 노래 운동에 반대하던 그는 노찾사를 떠나 88년 그룹 동물원에 참여한다. 동물원의 최고 인기곡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두곡을 모두 그가 불렀다. 단단하고 높낮이가 고른 그의 목청이 청음으로 빛을 발한 것이다. 그는 동물원이 유지하는 일정한 아마추어리즘에 동의할 수 없어 결국 여기도 떠난다. 1,2집은 개인의 사랑에 집착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오랜 주제에 빠져있었다. 현실을 정직하게 노래하던 모던 포크의 정신은 보이지 않았다. 독립해서 발표한 3집에서 그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에서 자신이 김민기, 서유석, 송창식,조동진 등의 뒷줄에 서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 대표적인 곡이 음유시인의 자의식과 자신감을 표현한 ‘나의 노래’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아무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 조그만 읊조림은 커다란 빛/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 그런 경향은 94년 발표한 4집에서 더욱 강화된다. 현실과 나이든 자신을 돌아보는 노래들이 많다. 그 자신도 이 앨범에 만족을 표시하여 앞으로 자신의 음악이 이런 형태가 될 것임을 밝혔다. 그 경향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한 악기구성과 구체적인 삶을 다루는 가사였다. “깊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일어나) 그는 당대 최고의 라이브 가수였다. 이야기와 노래를 적절히 섞어 공연을 유쾌하게 이끌곤 하던 그는 지난해 7년 말에 라이브 공연 1천회란 기념비를 이룩했다. ‘소극장 라이브’ 라는 한국 대중음악의 전통은 그와 함께 활짝 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소극장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게 됐다. 가수 김광석이 보기에 우리 사는 세상은 깊은 밤이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우리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있는지 둘러봐도 소용이 없다. 도저히 가야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는 것, 이리저리 바람 불고 물결치는 대로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는 것. 어쩌면 그가 바라보았던 세상은 지극히 어둡고 답답한 세상이었을 것 같다. 나이는 먹어 가면서 사는 것은 점점 더 삭막해져 가고 라이브 콘서트 1천회 라는 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가슴은 점 점 더 비어 가는 것을 체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서른 즈음에) 그러나, 그러나, 적어도 김광석에게는 꿈이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보았다.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미래가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을 지라도 적어도 그에게만은 희망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래 부르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끊어진 길”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운 세상 참 주인된 삶을 이제 우리 모두 손잡고 살아가야해 저 부는 바람에 실려 가는 향긋한 꽃 내음 내 깊은 잠 깨우니 나도 따라 가려네 그 길, 끊어진 너머로 나는 가려네.“ 그렇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향긋한 꽃내음이 풍겨 나는 세상. 사람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일어나”에서 그는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라는 절망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는 다시한번 힘있게 노래 불렀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여러분!! 나는 아직도 김성재, 서지원, 이상민 등과 김광석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성재, 서지원, 이상민 등으로 대표되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 가수들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성공이라는 강박관념이었다. 쏟아지는 박수와 화려한 조명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직 인기를 얻어야 한다는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 그것이 젊은 가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김광석은 그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가 꿈꾸었던 꿈, 이루고 싶었던 세상이 분명히 있었고 그것을 노래로 통해 이루려 했었고 그것은 단순한 인기나 성공은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없음”이다. 김성재, 서지원, 이상민 그들은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만 보았다. 여러분 또래의 학생들이 보내는 팬레터가 전부인 줄 알았다. 박수치는 사람들은 한참 박수를 치다가도 순식간에 박수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고 인기란 물거품과 같으며 밝게 비치던 조명이 꺼지고 나면 무대는 그 이전보다 더 어둡고 쓸쓸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수 소리가 그치고 사람들이 등을 돌리자 그것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김광석, 그는 분명히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세상이지만, 부초같이 썩어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이 새싹들처럼 그러나, 그는, 김광석은 봄의 새싹을 새로 돋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임을 잊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사람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그 힘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와야 하는 것임을 잊고 있었다. 그렇다. 유명한 연예인들의 삶 속에, 아니 그들을 보고 환호하는 여러분들의 삶 속에 진정 있어야 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인생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 여러분이 우상처럼 바라보고 있는 이상민이든, 서태지든, 유지원이든, 현주엽이든 그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릴 존재들, 잊혀 질 존재들이다. 우리는 너무나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참으로 영원하신 분, 근원이 되시는 분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진리를 전도서 기자는 일찍이 깨닫고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쫓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길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젊은이여 너 하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살아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심판하실 것을 기억하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여러분이 젊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곧 인생의 끝이 있다고 하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너를 세상에 보내시고 내 인생 주인이시고 또 때가 되면 너를 불러 가실 하나님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을 아신다 (2005. 4. 10) 모든 사람을 아신다 요한복음 2:23-25 속담에 대한 퀴즈 하나. 우리 몸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 눈꺼풀. 우리 몸 가운데 가장 비싼 것. 눈. “우리 몸이 천 냥이면 눈이 900냥” 우리 몸 가운데 가장 먼 곳. 눈과 입 사이. “눈이 십 리는 들어갔다.” “입이 십 리는 튀어 나왔다.”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것을 나타내는 속담은 무엇일까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알기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나를 진자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할 사람인지, 떠나갈 사람인지.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 믿는 건지, 무슨 이득을 바라고 교회 나오는 건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고, 무언가 좋은 것을 바랐다가 그만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다 실망한 사람들은 대개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을 미리, 그것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물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상을 보고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소위 사주(태어난 해, 태어난 달, 태어난 일, 태어난 시)를 알면 그 사람의 운명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맞춘다고 하는 족집게 점쟁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한다면 제가 하는 MBTI, 즉 성격유형검사는 지극히 과학적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사람의 성격을 알아내고자 하는 측정 방법입니다. 물론 MBTI도 해놓고 보면 나하고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눈매를 먼저 보든지, 목소리를 듣든지, 악수를 해보든지, 입은 옷의 맵시를 보든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보든지, 아니면 예람이 같이 키를 보든지, 직업이 무엇인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지.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바로 외모, 겉모습, 겉으로 나타나는 조건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실까? 구약 사무엘상을 보면 유대 나라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지만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선택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고 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비엘이고, 할아버지는 스롤이고, 그 윗대는 베고랏이고, 그 윗대는 아비아인데, 베냐민 사람이다. 그에게는 사울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 키도 보통 사람들보다 어개 위만큼은 더 컸다.』 (삼상 9:1-2) 한마디로 잘생기고, 키가 컸다. 물론 그 뒷부분을 읽어보면 사울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효자요, 작은 일에도 충실한 사람이요,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왕이 된 다음에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욕심이 많아져서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 임금을 세우셨으니 그가 그 유명한 목동 다윗입니다. 여러분! 목동 다윗이 사무엘로부터 선택받아 기름 부음을 받는 과정을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새에게 아들이 여덟 명 있는데 그중 하나를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이지요.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사무엘에게 나아왔습니다. 이때의 장면을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다음으로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이새가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새에게 "주님께서는 이 아들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뽑지 않으셨소"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아들들이 다 온 겁니까?" 하고 물으니,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양 떼를 치러 나가고 없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하였다. "어서 사람을 보내어 데려오시오. 그가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제물을 바치지 않겠소." 그래서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막내 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 (삼상 16:6-13)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중심을 본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본다. 여기의 중심이라는 단어는 곧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무엘마저도 외모,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려 했는데 하나님만은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시며,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상 8:39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주십시오. 주님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라고 솔로몬 임금은 고백합니다. 시편 7:9에 의하면 「악한 자의 악행을 뿌리 뽑아 주시고 의인은 굳게 세워 주십시오. 주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낱낱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에,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시는 표징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던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성전을 깨끗케 하는 사건을 행하신 그 유월절 기간 중에 많은 표징 곧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마 21:12부터를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사건을 행하신 후에 곧바로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여러분! 기적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금방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요?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 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꼼짝도 못하고 38년간 누워있던 병자를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이부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런데 여러분! 16절에 의하면 그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본 유대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그를 박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18절에 의하면, 심지어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그를 박해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적을 보고 믿기는 하지만 그 믿음이 진실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즉 기적을 보기는 보는데 기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범한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기적쟁이의 행위만을 보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한테 오는 이득만을 보고, 언제 또 기적을 행할까 하는 것만 기다립니다. 요한복음 6장에 그 유명한 5병2어 사건이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전부 다 배부르게 먹고 남은 부스거리가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14-15절에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 6:14-15) 그런데 여러분!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이 그 다음 날 다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이 왜 당신을 다시 찾아왔는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6:26) 그렇습니다. 기적을 보고 표징을 보고 믿기는 믿었지만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 아니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 곧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물론 세 번째는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지요. 여러분!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미리 알 수 있다고 하고 인간인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결과를 보아야 알 수 있으니 어려울 때 어떤 신앙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중에서 어디에 해당되는가? 여러분은 물론 다 세 번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눅 22:2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여러분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이다.」 그렇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힘들고 어려울 때, 시련과 역경에 닥쳤을 때 드러납니다. 진실한 믿음 역시 힘들고 어려울 때, 시련과 역겨에 닥쳤을 때 그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믿음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과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이 믿음 가지고 영원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면 (2005. 4. 17)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면 요한복음 3:1-15 여러분! 기독교인들 중에 제일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어느 교회 사람들일까요? 그렇습니다. 순복음교회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표어가 바로 3박자 구원인데 그 내용이 아주 유명하지요.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고” (요3서 1:2)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에 나오는 대로 우리 조상들이 누리기를 원했던 5복이 무엇 무엇인가요? 자, 여기 오늘의 본문에 세상적인 복은 다 누리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름하여 니고데모입니다. 우선 그는 건강과 장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산헤드린이라고 불리는 유대의회 의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이니까 그야말로 출세한 사람이지요. 게다가 그는 유명한 율법학자요, 랍비였습니다. 그러니까 분파로 보면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마23장에 보면 율법학자들이 얼마나 거들먹거리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마 23:1-7 읽기) 그뿐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니고데모는 부자였습니다. 니고데모가 부자라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요 19장에 나옵니다.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요 19:38-39)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그렇게 큰 돈을 쓸 수 있을 만큼 부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룰 것 다 이루었고, 가질 것 다 가졌고, 오를 만큼 다 올랐습니다. 그에게 더 이상 무슨 소원이 있거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찾아왔습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왔을까요? 학자들은 그 이유를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① 세상 사람들이 이목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② 어둠 속에 살던 사람이 빛으로 온 것을 상징한다. 빛은 곧 예수. ③ 율법 공부가 주로 밤에 행해지는 당시 관례를 반영한 것이다. 어쨌든 그는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니고데모가 단지 이런 소리를 하기 위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학자들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 세 가지를 찾아냈지만 저는 거기에 결정적인 것 한 가지가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데 그만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아까워서 어떻게 하나?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그렇습니다. 니고데모가 진정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니고데모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하고 싶은 소원을 보셨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하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파하려고 하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설교를 통해서든, 기적을 통해서든 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하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유대의 랍비이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시자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하고 맙니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이후 니고데모가 뭐라고 몇 마디 더 묻기는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다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13-15절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동의어이자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물론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위 성령받았다는 사람들마다 무슨 이상한 것들을 많이 이야기합니다만 핵심은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리는 것,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민수기 21:4-9에 나오는 그 유명한 뱀 사건을 아시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불뱀에게 물려 죽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래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들어주신 살 길, 그것이 바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쳐다보면 살았고, 아니면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만큼 극진하신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진리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진리일수록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리 믿기만 하면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원한 생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 이 간단한 진리를 놓치지 맙시다. 언제나 이 믿음 지키며 살아갑시다. 이 간단하면서도 놀라운 은혜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원과 심판 (2005. 4. 24) 구원과 심판 요한복음 3:16-21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인물, 니고데모. 그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세상적인 모든 복을 다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았고, 엄청난 부자였으며, 또한 아주 높은 지위에 올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몇 가지 이유를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어쨌든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을 남들이 알까 봐 두려워했고,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처럼 찾아간 자리에서 엉뚱한 이야기나 하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예수께로부터 핀잔이나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어떤 생각을 갖고 돌아갔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는 한 것인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깊은 의미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하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요한복음에는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두 번 더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유명한 사건 두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5절에 오병이어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16-21절에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가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22절부터 아주 긴 설교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예수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그 설교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66절에 의하면, “ 이 때문에 제가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고, 더 이상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7장에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 7:45부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돌아오니, 그들이 경비병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를 끌어오지 않았느냐?”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미혹된 것이 아니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지렁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를 찾아간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하였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바로 그 니고데모, 알아듣지 못하고, 핀잔을 먹고,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 그 니고데모가 은연중에 예수님을 감싸고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감히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 어찌 그를 심판한다는 말이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곧 “당신도 예수의 제자요?”라는 말입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기록도 없고, 예수를 향한 자기의 신앙을 드러낸 흔적도 없지만 어쨌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옹호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니고데모가 세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지난주에도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9:38-42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지낼 때, 니고데모는 향유 100근쯤 가져다가 함께 장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9:38에 재미있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아리마대 요셉이 이제 드러내놓고 자기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나타내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도 예수의 제자인 요셉과 함께 드러내놓고 행동함으로써 자신도 예수의 제자임을 공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도 성장해야 함을 다시금 다짐하게 됩니다. 1) 몰래 숨어서 주님을 찾아온 단계 2) 은근슬쩍 주님을 옹호하는 단계 3) 드러내놓고 주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단계 이때 니고데모는 주님의 장례에 참여하게 되고, 이로써 그는 참으로 영예로운 이름으로 성경책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입니다. 자, 이제 예수께서는 그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엄청난 진리의 말씀, 성경 말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구원과 심판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 2-3장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거기에 두심.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주심.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2:17) 그런데 그만 여자가 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뱀: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와: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였다. 뱀: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와가 따서 먹고, 남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창 3:19) 여러분! 창세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결국 “인간은 왜 죽는가?”에 대한 성서의 대답입니다. 성서는 한마디로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죄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뱀의 말에 나옵니다.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이것의 또 다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 있기는 어디 있느냐?’라는 것, 즉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근원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 곧 인간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취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로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창 3:8) 그렇습니다. 죄인이 하는 행동, 빛을 피해 숨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피해 어둠 가운데로 숨어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어둠 가운데 거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요 1:1-5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독생자이신 예수 앞에 서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제2의 아담, 제2의 하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가, 부인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기만 하면 그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이미 어둠의 자식, 죄악의 자식임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것은 곧 빛으로 나아오라는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초대를 받고도 거부한다면 이는 어둠 속에 남아있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니고데모를 엄숙한 진리에 대면시킵니다. 즉, 그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예수를 만난 다음에도 어둠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빛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거부하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간단하고도 심오한 진리를 요한복음은 증거합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떳떳하게 신앙생활하며, 또 증거해야 합니다. 이 믿음 가지고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믿음 (2005. 5. 22) 두 가지 종류의 믿음 요한복음 4:43-54 나는 수영을 잘 못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잘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못한다. 내가 수영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왜 그 자리에 그냥 있지? 수영이란 것이 어려서 배워야 하는 것인데 그만 배우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내 기억으로 나도 어렸을 때는 곧잘 수영을 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예날 이름으로 서울운동장에 수영장이 있어서 가끔 재수가 좋으면 거기에 갔었고, 거기서 수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언젠가 청계천 쪽으로 놀러갔던 적이 있다. 지금 청계천 복원한다고, 콘크리트 뜯어낸다고 난리인데 그때만 해도 제법 깨끗했었다. 초등학교가 청계천에서 멀지 않았고 그래서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청계천에 갔는데 그 옆에 사람들이 파고 콘크리트를 발라놓은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엄청 깊었다. 거기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만 빠졌다.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내게 온 것까지만 기억나고 그 다음은 기억에 없다. 누가 날 구해준 것인지. 그 사건 이후로 물에 들어가는 것이 겁이 났고, 결과적으로 수영을 못하게 되었다. 만일 그때 날 구해준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나를 구해준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인데 나는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한 번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인사하기는커녕 그 사건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산다. 그 사람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자, 여기서 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누가 끝까지 남아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분명히 성경에 의하면 예수께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가복음에서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막 1:32-33) 『그러나 그는 나가서, 모든 일을 널리 알리고,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1:45)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었던가요? 그것은 물론 예수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요? 나병과 중풍병을 고친 것은 여러 번이고 열병, 간질병, 수종병(곧 복막염), 오그라든 손, 허리굽혀진 병, 혈루증, 소경 고친 것은 다섯 번이나 되고 벙어리와 귀먹은 반벙어리도 고치고 많은 병자들, 온갖 병자들을 고쳤다는 기록도 마태복음에만 여섯 번이요,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것도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을 쫒아낸 것도 수없이 많고 그밖에도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 위로 걸어가시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예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는 그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이 장정만 5천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라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은인인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놀라운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막아서야 했고, 예수님을 위해 하다 못해 데모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남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마가복음에 의하면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하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5:40에 의하면,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 27:55-56에 의하면,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께 시중을 들면서 갈릴리에서 따라오 사람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야고보와 오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예수의 십자가 곁에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서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오직 한 남자,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그 곁에 서 있었다고 기록함으로써 간신히 제자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많은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여자들 몇이서 그것도 멀찍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어쩌면 그럴 수 있습니까? 저는 저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가만 있지만 자기들이 눈 앞에 뻔히 본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자기들의 생명의 은인인 예수께서 죽어가는데 모른 체 하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기적에 의존한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사마리아의 수가 섬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던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 갈릴리 가나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첫번째 표징, 곧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을 일으켰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신 고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45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 곧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가나에 왕의 신하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46절에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앓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쳐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찾아와서 애원했습니다.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주십시오.”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 다른 곳에서는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여집니다. 여러분, 이 신하에게는 적어도 예수님께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청할 만큼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치려면 우선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서 예수께서 계신 곳은 가나라는 마을입니다. 그리고 그 신하의 아들이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가나와 가버나움의 거리는 30마일, 그러니까 48km가 됩니다. 48km. 여러분! 아주 잘 걷는 사람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걷는다면 40km쯤 걷는답니다. 그러니까 48km라면 하루에 도저히 갈 수 없는 먼 길입니다. 이제 꼬박 걸어가 보아도 이틀은 걸려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으니 예수께서 여기서 말 한 마디로 아이를 고치는 기적을 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신하를 나무라셨습니다. “너희는 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그 신하는 예수께서 가셔서 자기가 보는 눈 앞에서 아들을 고쳐주기를 청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믿음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 신하는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마침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죽어가고 있는지 그냥 그 상태인지, 열이 높은지, 내렸는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알 도리가 없지만 믿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믿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믿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50절에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에 의존한 믿음입니다. 내가 눈으로 뭔가를 보았으니까, 내가 빵이라도 한 조각 얻어먹었으니까, 내가 아픈 몸이 나았으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낮은 다계의 믿음입니다. 예수께로부터 꾸중듣는 믿음인 것입니다. 요6장에는 5병2어 사건이 나옵니다. 그 사건이 소개된 다음에 2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또한 12:37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에수를 믿지 아니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외적으로 드러난 기적에만 의존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 겉으로 드러난 기적만을 보았지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두번째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신기한 일이나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의 ‘말씀’만을 듣고 믿는 믿음입니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단계의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다니고, 그래서 어디선가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하면 구름떼 같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때가 되면 또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로지 말씀만으로 믿는 믿음의 소유가자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변치 않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이러한 두번째 단계의 믿음, 진실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도 일한다 (2005. 5. 29)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1-18 여러분! 십계명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지표 열 가지를 말하지요. 그중 제4계명의 내용을 혹 기억하는 분 계십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이로 해서는 안 된다. 너희나,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출 20:8-11) 그렇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집에 있는 집짐승이나 다니러 온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엿새 동안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상 바로 이 구절만큼 철저히 지킨 것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정통 유대인이라면 지금도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이 구절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가 과연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결국 39가지 사항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규정했습니다. 쟁기질, 씨 뿌리기, 추수, 추수단 묶기, 타작, 도리깨질, 곡식 씻기, 체질, 방아질, 반죽, 빵 굽기, 양털 깎기, 표백, 재료 배합, 염색, 실 뽑기, 베틀에 실 얹기, 방적, 천 짜기, 다된 물건 치우기, 매듭짓기, 매듭풀기, 찢기, 바느질, 덫 놓기, 도살, 껍질이나 가죽 벗기기, 무두질, 긁기, 표시하기, 모양대로 자르기, 쓰기, 지우기, 짓기, 무너뜨리기, 불 붙이기, 불 끄기, 망치질, 공공장소에서의 운반행위 그 옛날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며 살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거의 모든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 중 단 한 가지라도 어기면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야말로 아주 철저하게,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에도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고, 또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친히 안식일에 아무 일ㄹ도 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면 안식일에는 태어나서도 안 되고 죽어서도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하시는 일이 단 두 가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① 생명을 주시는 일 ② 죽은 사람을 심판하시는 일 자,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마도 오순절로 생각되는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에 있는 문들 가운데 동북쪽에 “양의 문”이 있었으니 아마도 제물로 바칠 짐승을 끌고 들어가는 문이었기에 “양의 문”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 문 곁에 연못이 하나 있었으니 베드자다 또는 베짜타 또는 베데스다라고 불리우는 연못이었습니다. 그 뜻은 ‘자비의 집’이라는 아주 좋은 의미였습니다. 그 연못은 5각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 주랑, 개역성경으로 보면 행각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평소에는 아주 잔잔하던 그 연못에 갑자기 천사가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그 연못의 물을 휘저어 놓는데 이때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그 물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연못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런 환자들은 물론이요,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잽싸게 환자를 연못에 집어넣고자 가족들도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연못 주위가 얼마나 복잡하고, 냄새나고 또 긴장된 모습이었겠습니까? 언제 천사가 나타날지 모르니 모두들 불안한 채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을 것이고, 또 남들이 나보다 1초라도 빠르면 그동안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니 다들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본문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인간 세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쨌든 바로 그 연못 주위로 예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38년이나 누워있는 사람을 보셨습니다. 38년이라, 우리 어머니 쓰러지신 지 2년 하고 7개월인데 38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네요. 38년을 꼼짝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던 그 환자. 그야말로 몰골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친구들도 없고 가족들은 다 떠나가고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있는 셈이지요.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낫고 싶으냐?” 그 환자는 ‘낫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 대신 자기 형편을 고백했습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물에 들어갑니다.” (7절) 그렇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치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쟁이 치열했을 것은 뻔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양호한 상태의 병자들이 우선권을 차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 병자는 결국 38년 동안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속절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나타나셨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가거라.” 그리고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제 어떻게 됩니까? 고침을 받은 환자 자신은 물론 신나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것이고, 그것을 본 주위 사람들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눈을 비볐을 것이고 주위에 있던 그 많은 환자들은 자기들도 고쳐달라고 예수님 주위를 에워쌌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위에 있던 유대 사람들이 그 환자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그렇습니다. 환자가 한 행도, 곧 자기의 자리,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39가지 금지사항 중 맨 마지막 것, 바로 공공장소에서의 운반행위 금지를 어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환자 자신은 지금 38년이나 자기를 괴롭히고, 꼼짝 못하게 했던 병마에서 풀려나 신나게 걸어가는데 그것이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니 가서는 안 된다는 이 말은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 환자는 대답했습니다. “나를 낫게 해 주신 분이 나더러,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셨소.” 자, 이제 예수께서 그 환자의 병을 고치셨으며, 그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느냐? 안식일 지나서 하면 안 되느냐? 안식일을 어긴 것을 보니 너는 틀림없이 사탄의 힘으로 그 따위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안식일 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엄격히 지킨다는 자기네들도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생명을 주시는 일과 사람을 심판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가르쳤으니 38년이나 병을 앓았고,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것을 문자에 얽매어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근본이 뒤집힌 생각인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밝히심으로써 예수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또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데스다 연못과 같이 온갖 질병과 고통에 사로잡힌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리고 서로 나만 살겠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쟁터와 같은 현실 속에서 지치고 쓰러진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는 나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주위의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십시다. 이 은혜가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인에 대한 가르침 마태복음 5장 21-26절/2007년 4월 1일 여러분!십계명 가운데 제 6 계명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바로 ‘살인하지 못한다’라는 계명입니다(출 20:13, 신 5:17). 제 6 계명은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계명 중의 둘째 계명입니다. 두 번째 부분 중의 첫째 계명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월요성서연구 시간에 살펴본 것이지만 그 계명이 사실은 부모님을 통해 우리를 통해나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살인하지 못한다’ 는 계명은 사실상 두 번째 부분의 첫째 계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계명은 중요합니다.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거의 첫 번째 계명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사실 구약의 율법서에는 십계명 말고도 이 계명과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리고 각 구절들은 상황에 따라 좀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십계명 바로 다음에 나오는 출애굽기 2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그가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 실수로 죽였으면, 내가 너희에게 정하여 주는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 그러나 홧김에 일부러 이웃을 죽인 자는, 나의 제단으로 피하여 오더라도 끌어내서 죽여야 한다.” (출애굽기 21장 12-14절)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치사를 구분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도피성 제도를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하지만 만약 실수로 죽인 것이라면, 도피성으로 피해서 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홧김에 일부러 죽였다면, 도피성에 피했더라도 반드시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24장에 나오는 말씀은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짐승을 죽인 사람은, 생명으로 생명을 갚아야 하므로, 살아 있는 것으로 물어주어야 한다. 자기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피해자는 가해자가 입힌 만큼 그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혀라. 부러뜨린 것은 부러뜨린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기도 그만큼 상처를 받아야 한다. 남의 짐승을 죽인 사람은 그것을 물어 주어야 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이 법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사는 외국 사람에게도 같이 적용된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레위기 24장 17-22절)또한 민수기 35장에는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허락해 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쇠붙이 같은 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사람을 죽일 만 한 돌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만일 사람을 죽일 만 한 나무 연장을 들고 있다가, 그것으로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으면, 그는 살인자이다. 그러한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그 살인자를 죽일 사람은 피해자의 피를 보복할 친족이다. 그는 그 살인자를 만나는 대로 죽일 수 있다.” (민수기 35장 16-19절)그러니까 쇠붙이, 돌, 나무 연장을 준비했다가 사람을 죽이면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복수해야 하는데 그 피해자의 친족이 복수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구약의 율법에서는 이렇게도 여러 군데서 살인에 관한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인가요? 흔히 하는 말처럼 인간은 원래 악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이 내 이빨 하나를 부러뜨리면 다른 사람의 이빨 두세 개를 부러뜨려야 속이 시원하고, 내가 한 대 맞으면 상대방을 죽도록 패야 후련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복수를 하도록 내버려두면 보복의 악순환이 이루어지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 정해주신 제도인가요? 이것이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말하고 있는바 동태복수법(同態復搜法)인데 성경도 단순히 그런 차원에서 이러한 차원에서 법을 정해 주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을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죽임을 당할 것이다.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거기에서 번성하여라.“ (창세기 9장 1-7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당신이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실 터인데 왜냐하면,‘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죽임을 당할 것‘입니다.그렇습니다.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에 보내신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에 관계없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의 양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학력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장애를 가졌던지 아니든지, 어른이든지 아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을 죽이는 일은 단순히 생명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도전한 것입니다. 이 계명이 이렇게 중요하기에, 그 의미가 너무나 깊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하시면서 그 첫 번째 것으로 살인의 문제를 들고 나오셨던 것입니다.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아라’ 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기에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보면, 즉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에 따른다면 그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계명을 다 지키는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살인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를 리가 없고, 그러니까 그들은 이 계명을 분명히 지켰을 것입니다.그러나 문제는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과연 이 계명에 들어있는 그 정신을 다 지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손에 피를 묻혀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존중하는 그 정신이 지켜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22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셨습니다. 살인을 금하는 이 계명은, 제대로 완전히 이해된다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와 분노, 무례함과 경멸 같은 내적 태도들까지도 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동족 형제자매 또는 신앙의 형제자매들에게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분노하면 쉽게 내뱉는 두 가지 욕설도 금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여기 세 단계가 나타납니다. 우선 형제자매에게 분노하는(성내는) 일 -->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말하는 것(모욕하는 일) --> 형제자매를 향해서 바보라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그 단계마다 심판을 받음 --> 최고 의회에 끌려감 --> 지옥 불 속에 던져짐이라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단계 별로 처벌도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여러분!행위에 비해 주어지는 벌이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형제자매들에게 성낸다고 해서 심판을 받고,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최고재판소까지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바보라고 욕했다고 해서 지옥 불 속에 들어간다면 도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설교하지만 저도 이렇게 말한 적이 분명히 있는데 여러분은 그런 말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도대체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심한 말을 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바보’, 다른 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엄청난 의미 때문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시편 14편 1절)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말을 야곱의 자손에게 전하고,유다 백성에게 들려주어라.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예레미야서 5장 20-21절) 그렇습니다. ‘바보’니, ‘어리석은 자’니 하는 단어는 구약으로 보면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즉 무신론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본문은 형제자매를 향해서 얼간이라고 욕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인간의 재판을 받게 되며, 형제자매를 향해 함부로 바보라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라고 욕하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기에 그런 자들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방에게 개인적으로 화를 내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얼간이라고 부름으로써 상대방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는 그런 욕을 하면 최고재판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을 것이고, 바보라고 부름으로써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면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형제자매를 향해서 화를 내고, 얼간이라고 욕을 하고, 바보라고 말하는 일은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누구나 저지르는 잘못인데 거기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최고법정인 예루살렘 의회에 불려가고, 하나님의 영원한 벌인 지옥을 말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의도적인 불균형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일부러 균형에 맞지 않게 말하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분노는 이미 형제자매들에 대한 공격이며, 공동체 관계를 해치는 범죄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려버리는 범죄이기에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살인과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예수께서 ‘살인하지 말아라’라는 계명을 없애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법을 육신의 살인을 금하는 규정으로 축소시킨 편협한 해석을 물리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계명을 완전하게 수용하려면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할 형제자매들로 인정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살인 금지 계명에 부여하시는 해석을 두 가지 예를 들어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23-24절이 첫 번째 예요, 25-26절이 두 번째 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무슨 말입니까?옳든 그르든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이 갈등이 살인의 근원이 되므로 화해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종교적 행위보다, 즉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급한 의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한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를 추구하는 형제적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3절) 두 번째 예는 25-26절에 나옵니다.“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촉구하심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을 우리가 기꺼이 없애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빚을 없애주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특히 26절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선고를 나타내줍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책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강조했고, 그래서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 비유도 마태복음 25장에만 나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분노의 문제와 결부시켰던 것입니다.그렇습니다.예수께서는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계명이 가지고 있는 근본정신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내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베풀 것을 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나의 사랑하는 신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는 누군가를 죽일 만큼 끔찍한 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계명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형제자매를 향해서 성내고, 얼간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를 바보라고 불렀다면, 또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 앞에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간직하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고, 내 형제자매들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내 형제자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를 언제나 존중하고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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